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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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이겁니다. 뭐가 잘못된 걸까요? 팬데믹 뿐만이 아니라 우리 시민의 삶에서요. 무엇이 우리를 갈라지게 하고 증오의 정치까지 오게 한 걸까요?

최근 수년간 승자와 패자사이의 골은 더 깊어져 정치에 악영향을 끼치고 우리를 갈라놓았습니다. 이 분멸에 불평등도 일부 원인을 제공해습니다. 하지만 승패를 향한 우리의 태도도 여기에 한몫했죠. 승리의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노력으로만 성공을 했다는 믿음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매기죠. 반면 경쟁에서 실패한 사람은 자신을 비난할 수밖에 없게 되죠.

성공에 대한 이러한 사고방식은 꽤 매력적인 원칙으로 다가오죠. 모두가 평등한 기회를 얻는다면 승리는 온전히 승자의 것이기 마련이죠.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핵심이죠. 현실은, 물론, 동 떨어져 있습니다.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커서도 가난하게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유한 부모는 자식들에게 그들의 혜택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비리그 대학교 학생 중 상위 1% 소득층의 자녀들이 나라 전체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하위 소득 자녀들보다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부르짖는 이 능력주의 원칙에 부응하는데 실패해서가 아닙니다. 원칙 자체에 결함이 있습니다. 여기엔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능력주의는 공익을 좀 먹는 원칙입니다. 승자를 교만의 길로 인도하고 패자에게 굴욕만을 남깁니다. 성공한 사람에게 자신의 승리에 깊이 심취하도록 부추기고 성공하도록 도와준 운의 영향을 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보다 운이 없었던 사람들을 얕보게 만들어 그들이 나보다 실력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죠. 이것은 정치에 있어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중적 반발의 가장 유력한 원인은 많은 노동자가 엘리트 부류가 그들을 무시한다고 느끼는 데에서 옵니다. 이것은 합법적인 불만이죠.

심지어 세계화로 인해 불평등 문제와 임금 불균형이 더욱 깊어지는 가운데 지지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신랄한 충고를 건넵니다. "세계화 시대에 경쟁에서 이기려면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해." "배운 만큼 버는 거야." "노력한다면 성공할 수 있어." 엘리트 부류는 이러한 충고가 모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걸 모르죠. 대학을 가지 않는다면 이 새로운 경제상황에 번영하지 못한다면 실패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죠. 많은 노동자가 왜 능력주의 엘리트에게 적대적인지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의 시민 생활을 세 가지 측면에서 재고해 봐야 합니다. 대학의 역활 노동의 존엄성 성공의 의미

먼저 대학교의 역할을 기회의 결정권자로 여기는 태도에 대해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일류 회사에 다니며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은 단순한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바로 많은 사람들이 4년제 대학교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죠. 실제로 미국 인구의 3분의 2가 이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대학 졸업장이 존엄하고 좋은 삶의 필요조건이 되는 경제를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대학 진학을 장려하는 건 좋은 일입니다.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기회를 넓힌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겠죠. 그러나 그것이 불평등의 해결책은 아닙니다. 경쟁사회의 전장에서 살아남도록 시민을 무장시키는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학위가 없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필수적으로 기여하기 때문이죠.

일의 가치에 대해서도 재고하여 그것을 정치의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일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닌 공익에 기여한다는 그렇게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하죠.

로버트 케네디는 반세기 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동료애, 지역사회, 애국심. 이 필수적인 가치들은 그저 물건을 소비하고 구매하는 것에서 오는 것들이 아니라고요. 충분한 보수가 제공되는 품위 있는 일자리로부터 오는 것이죠. 직원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일자리들이요. "저는 나라를 세우는 데 기여했습니다. 저는 위대한 공익사업에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시민 정서를 오늘날의 공공사회에서 찾기는 매우 힘듭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버는 돈의 액수를 공익에 기여하는 바를 가늠하는 잣대로 여기죠. 그러나 이것은 실수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예전에 그 이유를 설명했죠.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일어난 위생관리시설 직원들의 파업을 기억해 봅시다. 암살당하기 직전 킹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볼 때, 우리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사람들은 의사만큼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질병들이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모든 직업은 고귀합니다."

지금의 팬데믹이 이를 증명하고 있죠. 우리가 하찮게 여기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사실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 것이죠. 배달원 관리사 식료품 가게의 점원 창고 직원 트럭 운전사 간호 조무사 탁아소 직원 자택 간병인 이들 모두 높은 임금을 받거나 큰 존경을 받는 직업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 직업 종사자들을 필수 인력이라고 부르죠. 지금이 바로 그들의 임금과 인식을 어떻게 하면 그들의 일에 대한 중요성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는지에 대한 토론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도덕, 정신적인 변화의 시점입니다. 능력주의의 교만에 의문을 가져야 하죠. 내가 성공한 원인이 윤리적으로 볼 때 오직 나의 실력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내가 잘나서 내가 속한 사회가 내가 가진 재능을 알아보고 상을 주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운이 좋았던 것일까? 성공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고집은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게 하죠. 인생에서 운의 역할을 감사히 여길 때 우리는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출생이라는 단순한 사고인지 아니면 신의 은총인지 또는 운명의 신비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여기 나는 존재합니다.

겸손의 정신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민정신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를 갈라놓은 성공에 대한 가혹한 윤리로부터 돌아올 수 있는 길의 시작이죠. 능력주의의 횡포를 뛰어넘어 증오심 보다 너그러움이 더 많아진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