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틴 데이빗슨 (Justin David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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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강연장에 오셨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상상해보세요.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정말 똑같이 생긴 거예요. 연령이나 피부색 잘 생긴 외모까지 말이죠. 자신의 옆에 앉은 사람이 전혀 남다른 내면을 가진 인물이라 할지라도 절대 그걸 알아채지 못할 겁니다. 다들 같은 옷에, 시종일관 무표정이니 말이지요. 이런 섬뜩한 변화가 지금 도시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건물에 나타나고 있죠. 도시는 다소 거친면과 그림자, 다양한 질감과 색상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아직도 여러 도시에서 독특한 개성과 특징을 가진 건축물을 찾아볼 수 있죠. 리가의 아파트 건물 에멘도 마찬가지고요. 비엔나의 공공임대 주택 애리조나의 호피족 마을 뉴욕의 브라운스톤 샌프란시스코의 목재가옥입니다. 이들은 궁전이나 성당이 아닙니다. 평범한 주거지에 불과하지만 그 도시의 평소 멋진 모습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죠. 이런 도시들이 멋져 보이는 이유는 거주지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미를 추구하는 본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건축물의 거친 표면을 통해 촉감으로 도시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벽돌과 돌들을 따라 손을 훑다보면 거리를 그대로 느낄 수 있잖아요.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을 겁니다. 도시가 매끄러운 면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죠. 새로운 번화가에 들어서는 건물들은 거의 한결같이 콘크리트와 철제 구조로 지은 뒤에 외부를 유리로 감싸버리죠. 세계 곳곳의 스카이라인을 한번 보세요. 휴스턴 광저우 프랑크프루트 똑같은 모습의 고광택 로봇들이 지평선 위를 행진하는 것 같군요. 그럼 우리는 무엇을 잃게 될까요? 건축가들이 다양한 재료를 쓰지 않을 때 우리가 잃게 될 것들을 생각해보세요. 화강암이나 석회암, 사암을 쓰지 않고 나무, 구리, 점토, 벽돌, 욋가지, 회반죽 같은 재료를 쓰지 않으면 건축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도시도 매력을 잃게 됩니다. 이건 마치 여러 나라의 온갖 산해진미들을 기내식으로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웃음) 치킨 드릴까요? 아니면 파스타? 더 심한 사실은 모스크바에 있는 유리 건물들을 보면 도시 생활의 공동체적 측면을 굉장히 소홀하게 여긴 것 같습니다. 이런 건물들은 다분히 건물주나 건물에 사는 사람만을 위한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죠. 건물 사이의 공간을 오가는 우리의 생활은 무시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유롭게 다닐 권리가 있습니다. 빛나는 유리 건물들이 급속하게 퍼지면서 도시의 숨통을 조이고 공용 공간을 빼앗고 있습니다. 우리는 건물의 외관을 메이크업처럼 생각해서 사실상 완성된 건물의 마지막 단계에 올리는 장식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건물의 외면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한 도시의 외관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사례입니다. 스페인 살라망카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마요르 광장에 자연히 끌리더군요. 온 종일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른 아침이면 햇살이 천천히 건물을 비추기 시작하면서 그림자가 선명히 나타납니다. 밤이 되면 조명 빛이 건물을 나누어 수백 가지의 공간이 뚜렷이 드러나죠. 발코니, 창문, 아케이드까지 각각의 공간이 독립적인 시각적 체험을 제공합니다. 그 섬세하고 농밀한 광경은 광장을 하나의 무대로 만들어 버립니다. 모든 세대가 어울릴 수 있는 무대죠. 길 위에 자유로이 드러누운 십대들이나 벤치에 앉아 느긋하게 쉬고 있는 노인들 일상이 하나의 오페라 무대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살라망카에서는 늘상 그런 무대가 열립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부분은 단순히 건물의 외관 뿐입니다. 형태나 기능, 구조에 관한 것이 아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외관은 우리 일상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건물은 주변의 공간을 창조하고 사람들을 그곳으로 끌어들이거나 밖으로 내몰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 차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관의 질적인 부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살라망카의 마요르 광장과 비교되는 곳이 있죠. 파리 부도심인 라데팡스입니다. 돌풍에 취약한 유리로 된 열린 공간인데요. 회사원들은 대개 서둘러 그곳을 지나칩니다. 곧바로 지하철에서 자신들의 사무실로 향할 뿐이죠. 그 외에 이곳에서 머무는 것을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1980년대 초에 건축가 필립 존슨은 피츠버그에 우아한 유럽형 광장을 만들기 위한 시도를 했습니다. 바로 PPG 광장이죠. 각종 상가가 주변을 둘러 싸고 있는 약 2000 평방미터 면적의 공간입니다. 건물은 반사유리로 마감되었죠. 건물의 모서리 부분은 금속으로 마감 장식을 했고 고딕탑 모양의 장식이 하늘 위로 윤곽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상에서의 모습은 마치 검은 유리로 된 새장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여름에는 아이들이 분수를 오가며 뛰어다니기도 하고 겨울이면 스케이트를 타기도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은 편안하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쉬거나 대화를 나누는 그런 류의 공간이 전혀 아니거든요.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장소는 여러 이유로 번영하거나 사라집니다. 건축물도 그 중 하나일 뿐이지요. 하지만 결정적인 요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최근에 생겨난 광장들을 보면 호주 맬버른의 페더레이션 광장이나 덴마크 코펜하겐의 슈퍼킬렌 공원 같은 곳은 전통과 현대가 성공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부드러움과 거침 무채색과 밝은 색채가 조화를 이루고 유리재만을 지나치게 고집하지도 않죠. 저는 유리재 사용을 반대하지는 않아요. 오래전부터 사용된 다재다능한 건축 재료죠. 제조나 운반도 쉽습니다. 설치나 교체도 간편하죠. 깨끗하구요. 적용 범위는 대형 고광택 패널부터 반투명한 벽돌까지 다양합니다. 코팅 처리를 새로 하면 분위기도 바꿀 수 있고 색상도 바꿀 수 있습니다. 뉴욕 같은 고비용의 도시에서는 이런 점이 마치 마법처럼 작용합니다. 조망 효과가 커지면서 부동산 가치가 배가되죠. 지역개발자 입장에서는 그 점을 유일하게 부각시켜 말도 안되는 가격을 정당화시키고 있습니다. 19세기 중반으로 한번 가보죠. 런던의 크리스탈 궁전의 건축 과정을 살펴보면 이 시기에 유리는 전형적인 현대의 물질로 각광을 받게 됩니다. 그후 20세기 중반에 와서는 일부 미국 도시의 중심지를 유리가 덮어버리게 되었죠. 실로 거대한 사무용 건물의 대부분에 유리가 사용됩니다. 스키드 모어, 오윙스와 메릴이 설계한 맨하탄의 레버하우스가 대표적이죠. 유리가공 기술이 발전하면서 마침내 건축가들은 굉장히 투명한 구조물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벽이 아예 사라졌죠. 이러한 발전과 맞물려 유리는 고도성장 도시의 기본 건축재로 떠오릅니다. 물론 거기에는 명확한 이유가 존재합니다. 세계적으로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면서 저소득층은 날림으로 지은 판자촌에까지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지낼 아파트나 건물의 수요가 생겨났죠. 더 큰 건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경제성 측면에서 고층화되었고 저렴하면서도 실용적인 재료로 건물 외벽을 마감해야 했죠. 하지만 유리는 어떤 점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표현력의 한계죠. 이것은 어느 광장의 외벽 모습인데요. 라틴 아메리카계 이전의 도시인 멕시코 남부 미틀라의 광장입니다. 2000년이나 된 이 조각을 보면 이곳이 의식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장소임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요소들을 통해 과거 역사와 구조물 간의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죠. 외벽의 조각들과 주변의 산악 지형이 이어지고 그 유서깊은 장소의 정상에 지어진 교회는 주변 지역의 석재로 세워졌습니다. 멕시코 남부 오악사카 주의 석회 외벽 건물들은 그 자체가 캔버스가 되어 밝은 색상, 정치적 메시지의 벽화, 세련된 그래픽 예술까지 담아냅니다. 건물이 섬세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고 있죠. 유리 건물이 넘쳐나는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입니다. 다행인 것은 건축가와 개발담당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건축재료의 가치를 재조명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현대적 감성을 유지하면서도 말이죠. 벽돌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재료들을 새롭게 활용한 경우도 있습니다. 테라코타도 마찬가지죠. 노르웨이의 스노헤타가 개발한 공장제작 외벽 패널 제품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의 건설에 적용되었고 건물이 마치 조각된 작품 같은 느낌을 줍니다. 건축가 스테파노 보에리는 더 나아가 살아있는 건물을 창조해냈습니다. "수직의 숲"이라는 이름의 이 한쌍의 주거 건물은 그야말로 녹색 식물의 형상이죠. 현재 그는 중국 난징에서 이와 비슷한 작품을 설계중이라고 합니다. 이런 녹색 외벽의 건물들이 유리건물들 만큼이나 많아진다면 중국의 대기가 얼마나 깨끗해질지 상상해보세요. 하지만 이런 사례가 대부분 일회성에 그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미학적 프로젝트를 세계적 움직임으로 확산시키기는 쉽지 않죠. 바로 거기에 시사점이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얻어지는 재료를 건축 자재로 사용한다면 도시의 모습이 똑같아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뉴욕은 구리 사용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유의 여신상도 그렇죠. 울워스 빌딩의 첨탑도 그렇고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행에 뒤쳐진 재료로 취급되었습니다. 뉴욕 건축회사 숍에서 코퍼 빌딩에 구리를 쓰기 전까지는 말이죠. 이스트 강변에 있는 한 쌍의 휘어진 건축물입니다. 아직 공사중이지만 일몰이 금속 재질의 건물을 비출 때 나타나는 광경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녹색의 구리빛을 낼 겁니다. 건축물은 사람과도 같습니다. 경험이 얼굴에 다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굉장히 시사하는 바가 크지요. 왜냐하면, 유리는 낡으면 그냥 교체하면 됩니다. 그러면 건물은 그 이전과 똑같아 보이겠지요. 마침내 그 건물이 철거되기 전까지요. 대부분의 건축재들은 저마다 특별한 성질이 있는데요. 역사와 기억할 순간 순간들이 그 물질에 스며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의 건축물에 나타나 있는 겁니다. 건축회사 에네드입니다. 솔트레이크 시티의 유타 자연사 박물관을 지으면서 구리와 아연을 사용했고 인근에 150년간 묻혀있던 광석을 외장재로 썼습니다. 그 때문에 그 건물은 주변의황토색 언덕과 감쪽같이 어울립니다. 결과적으로 자연사 박물관이 지역의 자연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 되었죠. 프리츠커 수상자인 중국 건축가 왕슈는 닝보에 역사 박물관을 세우면서 단순히 과거의 산물을 포장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벽면에 모든 기억을 아로새기고 싶었죠. 벽돌, 석재, 지붕 널을 활용하는 것으로 구상하고 당시 주변 마을 철거 과정에서 나온 자재들을 활용했습니다. 오늘날, 건축가들은 유리를 씁니다. 서정적이면서도 동시에 창의적인 방식으로 말이죠. 예를 들어 뉴욕의 이 두 건물은 하나는 건축가 장 누벨이 지었고 이것은 프랭크 게리의 작품입니다. 웨스트 19번가를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는데요. 건물이 서로 반사되어 비치는 모습은 마치 빛의 교향곡 같습니다. 하지만 한 도시에 유리가 기본 건축자재로 쓰이면서 건축물이 늘어난다면 마치 거울방 같이 되어버릴 겁니다. 불안하고 차가운 느낌을 주겠죠. 결국 도시라는 공간은 다양성이 집중적으로 모인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계 곳곳의 문화, 언어, 생활 방식들이 한데 모여 어우러지죠. 그래서 이러한 다채로운 건축물들의 다양성을 획일화라는 참담한 결과로 가져가선 안됩니다. 도시의 다채로운 경험을 가치있게 여기는 건축물을 창조해야만 합니다. 감사합니다.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