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일은 놀이 입니다. 그리고 저는 디자인할 때 놉니다 심지어 확실히 하기 위해 사전을 찾아봤습니다. 실제로 해봤죠. "play (놀다)"의 사전적 의미는 첫째, 어린 아이같은 행동이나 노력 두번째는 도박입니다. 저는 디자인 할 때 두가지 의미 모두를 행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항상 아이 같기도 하고 도박도 합니다. 만약 당신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속해있는 구조나 상황에 뭔가 선천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디자이너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진지한 부분은 절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거의 이해할수 없었습니다. 어떤 에세이를 기억해내기 전까지 말이죠. 내가 30년전에 읽었던 글입니다. 작가는 러셀 베이커였는데, 그는 뉴욕타임즈에 "관찰자" 칼럼을 쓰던 사람이죠. 그는 상당한 유머가 있어요. 이 글을 읽어드릴게요. 발췌문입니다. 저를 확실히 감명시켰거든요. 이것은 친절한 조언입니다.
진지해지세요. 무슨 뜻이나면, 당연히, 엄숙해지라는거에요. 엄숙함은 쉽습니다. 진지함은 어렵습니다. 어린아이들은 거의 항상 진지함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이 그들을 유쾌하게 만들어요. 어른들에 비교해서 말입니다. 그에 비해 어른들은 엄숙합니다. 정치에서도, 진지한 후보자는 드뭅니다. 예를 들어 애드라이 스티븐슨은 아이젠하우어 같은 엄숙한 사람들에 의해 쉽게 제압됩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 드문 진지함을 쉽사리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진부한 엄숙함을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평범하며, 흔히 당신에게 좋다고 알려져 있는 조깅은 엄숙합니다. 포커는 진지합니다. 워싱턴 DC는 엄숙합니다. 뉴욕은 진지하고요. 교육 회의에 참석해서 미래에 대해 강의하는 것은 엄숙합니다. 홀로 산책을 하면서 티파니 매장 강도질 음모를 어리숙하게 세우는 것은 진지합니다.
자, 이제 러셀 베이커의 엄숙함이나 진지함의 정의를 디자인에 적용해보면, 질에 대한 특이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엄숙한 디자인은 종종 중요하고 매우 효율적인 디자인입니다. 엄숙한 디자인은 또한 사회적으로 올바르고요, 적절한 청중에게 받아들여집니다. 올바른 신념의 디자이너들과 모든 고객이 추구하는 바입니다. 진지한 디자인, 진지한 놀이는 다릅니다. 확실한 것은, 이것은 종종 충동적으로, 직관적으로, 사고에 의해, 혹은 우연히 발생합니다. 순진함이나 오만함으로부터 얻어집니다. 혹은 이기심이나 부주의함으로부터 생기죠.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습성의 말도 안되는 부분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진지한 디자인은 불완전합니다. 여느 독창적인 것들의 기술 규범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진지한 디자인은 또한, 그리고 자주, 실패합니다. 엄숙한 시선으로 바라봤을 때 말이죠. 왜냐하면 진지한 놀이의 기술은 완벽함이 아닌 창조, 변화, 반란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벽함은 엄숙한 놀이에서 발생합니다. 저는 디자인 커리어를 초현실적 계단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계단을 보면, 당신의 20대 때는 높이가 높고 폭은 매우 좁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발견들을 하죠. 젊을 때는 빠른 속도로 뛰어 오릅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은 없고 배울 것은 많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배우는 경험입니다. 그리고 그냥 위로 뛰어 오르는 거죠. 나이가 들 수록, 높이는 낮아지고 폭은 넓어집니다. 그리고 당신은 다소 느려진 속도로 움직입니다. 왜냐하면 거의 발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더 먹고 노쇠해지면, 당신을 망각으로 이끄는 이 침울하고 긴 계단을 매우 느린 속도로 기어갑니다.
저는 진지해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엄숙해달라고 고용되었지만, 엄숙할 필요 없는 때 마저 엄숙해저버리는 날들이 늘어갑니다. 그리고 저의 35년간의 실무 경험동안 제가 진심으로 진지했던 것은 4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 것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매우 특이한 상황 가운데 발생했거든요. 아이로 사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제 20대에는 음반회사에서 일했습니다. CBS 레코드의 음반 표지들을 디자인 했습니다. 그 때는 제가 얼마나 멋진 직업을 가졌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모두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제가 디자인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제가 디자인에 발을 딛는 시점에 발생한 모든 것들이 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정말 정말 정말 헬베티카 서체를 증오했어요. 저는 헬베티카가 가장 깨끗하고, 가장 지루하며 독재적이고 억압적인 서체라고 생각했어요. 헬베티카로 디자인된 모든 것을 다 증오했어요. 그리고 제가 대학에 있었던 시절에는, 이런 류의 디자인이 유행했고 인기가 많았어요. 이것은 루디 드 하라가 디자인한 꽤 사랑스러운 책 표지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참 싫었습니다. 헬베티카로 디자인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패러디를 해보았어요, 저는 단지 그것이 완전히 지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 인생의 목표는 헬베티카로 만들어지지 않은 작업들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헬베티카로 만들어지지 않은 작업을 한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어요. 스스로 찾아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70년대 초반에는 디자인사에 대한 책들이 별로 없었어요. 과잉 디자인 출판은 없었던거죠. 실제로 헌책방에 가야했어요. 유럽에 가야했죠. 장소들에 가야만 했고 책들을 찾아야 했어요. 그리고 제가 관심을 가졌던 것들은 아르누보, 혹은 아르데코, 혹은 빅토리안 타이포그래피 혹은 뭐든 전혀 헬베티카가 아닌 것들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 방식의 디자인을 독학했어요. 제가 상대적으로 젊었을 때였고 이러한 것들을 음반 표지와 제 디자인에 별난 방법으로 사용했어요. 저는 교육받지 않았었죠. 단순히 이런 것들을 조합해본거죠. 빅토리안 디자인을 팝과 섞어보고, 아르누보와 다른 것들을 섞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풍부하고 공들여진 음반 표지들을 만들어냈어요. 제가 포스트모더니스트이거나 역사학파라서가 아니라 이것들이 뭔지도 잘 몰랐기 때문이죠. 저는 단지 헬베티카를 싫어했어요.
그리고 그러한 열정이 저를 매우 진지한 놀이로 이끌었어요. 과하게 교육을 잘 받은 지금의 저로서는 절대 할 수 없을 놀이죠. 그러한 형태의 젊음에는 멋진 뭔가가 있었어요. 스스로 자라고 놀 수 있도록 놔두고 완전한 꼬마가 될 수 있었죠. 그러고도 성취해낼 수 있었던 거죠. 70년대 후반이 되어 이 작업들이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음반 표지들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각종 상을 받게 되고 사람들이 알아보게 되었어요. 어느 순간 저는 포스트모더니스트였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칭찬받았다가, 후에는 혹평을 받기도 하고 그랬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가 엄숙해져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진지한 작업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그 이후 14년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80년대의 대부분을 엄숙하게 보냈습니다. 제게 요구된 디자인들을 해내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저였고, 저는 진지함에서 엄숙함으로 옮겨간 상태로 살고 있었으니까요. 죽도록 진부함이 끊임없이 재발견 되는 상태였죠.
그래서 여기에 제가 진지한 놀이를 성취했던 두 번째 상황이 있습니다. 폴 뉴먼의 영화 중에 제가 사랑하는 "평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 몇 분이나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최고입니다. 영화 안에서 그는 몰락한 변호사 역할입니다. 교통사고로 돈벌이하는 악랄한 변호사가 되죠. 그리고 그는 의료과실 건이 주어집니다. 다소 쉬운 건수였죠. 그리고 그 사건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그는 감정이입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의뢰인을 동정합니다. 그리고 그의 도덕성과 목적을 회복합니다. 결국 그는 그 사건에서 승리합니다. 그가 절망하는 한 장면에서, 영화 중반부에 나오는데, 그가 난관에 봉착합니다. 그는 너무도 이 사건을 필요로하고 사건을 승리해야만 하는 장면입니다. 그 때 폴 뉴먼의 단독샷이 잡히는데요, 그의 사무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단지 이 사건 밖에 없어. 다른 사건들은 없는거야. "단지 이 사건 밖에 없어. 다른 사건들은 없는거야." 그리고 그 순간 그 열망과 집중을 통해 그는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진지한 연극의 창조에 있어서 훌륭한 위치였습니다. 그리고 전 조지 울프라는 감독을 만났을때 인 1994년에 그 순간을 가졌습니다. 그는 저에게 뉴욕 세익스피어 페스티발 을 위한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맡기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알려졌고, 그 다음엔 퍼블릭 씨어터 (극장)이 되었습니다. 전 이 프로젝트에 예전에 결코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극장 광고가 어떠했나 보여줍니다. 이것은 신문들과 뉴욕 타임즈에 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일종의 논평입니다. 퍼블릭 씨어터는 사실 이것보다 훨씬 나은 광고를 했습니다. 그들은 로고도 없고 아이덴티티도 없었지만, 폴 데이비스가 그린 이 매우 도상적인 포스터들이 있었습니다. 조지 울프는 다른 디렉터로부너 인계받았고 그는 극장을 변화시키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도시적이고 시끄럽고 포괄적인 장소로 만들길 원했습니다. 제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사랑에의 도움으로, 저는 이 프로젝트에 몰두 했습니다. 다른 것은 그것의 전체성이었고, 제가 정말로 한 장소의 시각적 표현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전에 결코 해본적이없는 방식으로였죠, 그 방식은, 가장 작은 광고, 티켓,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모두 저에 의해 디자인되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형식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강요하는 아무 사내 부서가 없었습니다. 전 사실상 3년 동안 모든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 극장이 했던 모든 종이 조각, 온라인상의 모든것들을요.. 제가 다른 작업들을 하고 있었긴 했지만, 그것은 단 하나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는 고객과 가져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살고 숨쉬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정말로 저를 표현수 있게 하고 성장하게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직장이 주어지게 되었을 때를 아실 거라고 생갛합니다. 드물기 하진만, 여러분이 이런 기회를 가질 때 그것은 진지한 놀이의 순간입니다.
저는 이러 것들을 했고, 여전히 합니다. 저는 여전히 퍼블리 씨어터를 위해 일합니다. 전 그 회원이며, 여전히 그 극장에 관계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퍼블릭 씨어터의 주요 시점은 1996년 이었습니다, 제가 브링인 더 노이즈, 브링인더 펑크 캠페인을 디자인하고 나서 2년 후였는데요, 캠페인은 뉴욕 모든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일이 일어났는데요, 그것은, 매우 유명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지한 것에 대한 자살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엄숙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어떤일이 일어났냐면, 뉴욕시가 어느정도 저의 아이덴티티를 먹어치웠다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베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여기 뉴욕타임즈에 실린 광고가 있습니다, 누군가 '마인드게임' 이란 연극을 위해 한것입니다. 그 다음 시카고가 나왔는데요, 더 많은 그래픽들을 사용했고, 퍼블릭 씨어터의 아이덴티티는 완전히 먹혀버렸고, 없어져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것을 바꿔야한다는 뜻이었죠. 그래서, 전 매 시즌이 다르도록 바꾸었습니다. 전 이 포스터들을 계속해서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최초 독자성의 진지함을 가지진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것들은 너무 개인적이었고, 같은 모든것들 중에서의 영향력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퍼블릭 씨어터 이래, 주요한 협회의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위한 한 다스 이상의 작업을 해야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그 진지함을 다시 움켜잡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뉴욕시에 있는 매우 크고 중요한 협회들을 위해 일합니다.
그 협회들은 엄숙하고, 디자인도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퍼불릭 씨어터 작업보다 더 공들여졌고, 더 많은 돈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순간들이 생겼다 없어졌다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지한 디자인을 성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 우리모두가 기회를 가졌다고 새각하는데요-- 전적으로 완전히 그 일에 대해 제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2000년도에 일어났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수의 각각 다른 건축가들이 저에게 같이 극장안의 디자인을 하길 의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환경 그라픽을 하기로 하고, 건물에 그것들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일을 해본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건축도면을 어떻게 읽는지 몰랐으며, 그들이 무엇에 관해 말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전 정말로 그 하나의 일이 4년간 계속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전 그래픽 디자인의 긴박성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런 종류의 세부 항목에의 주의는 ADD를 가지고 있는 저 같은 사람에게 정말 서투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 그 실제로 그래픽을 건축에 통합하는 과정들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가 무엇을 하고있는지 몰랐었기 때문입니다. 왜 바닥에 사인이 있을 수 없을까? 뉴요커들은 그들의 발을 보죠, 그다음, 저는 배우들이 그들의 큐 신호를 바닥에서 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사인 시스템이 이치에 맞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건물과 정말 독특한 방법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그것들은 코너들을 돌아서, 빌딩의 옆면으로 올라가며, 건축에 융합되어졌습니다. 이것은 90가와 브로드웨이에 있는 심포니 스페이스입니다. 글자는 스테인레스 스틸과, 광섬유로 된 백라이트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건축가인 짐 폴쉑은 본질적으로 저에게 타이포그라피를 가지고 놀 수 있는 캔버스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지한 놀이었습니다. 이것은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아이들의 미술관 인데요, 완벽하게 비싸지 않은 재료들로 만들어졌습니다. 앞으로 빼낸 타이포그라피에는 네온으로 된 백라이트가 있습니다. 제가 전에 해 본 적이 없고, 전에 지은적이 없는 것들,,, 전 단지 그것들을 하는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투명합성수지로 만들어진 기부자들의 벽입니다,, 다음은, 비싸지않은 사인입니다.
이것들중 제가 가장 좋아한 작업은 뉴저지주 뉴악에 있는 작은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공연 예술 학교 입니다. 이것은 그 빌딩인데요-- 그들은 돈이 없었고 그 벽을 다시 덮어씌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말했죠, 우리가 10만 달러를 당신에게 준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요, 그리고 전 그 빌딩 위에 약간의 포토샵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페인트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린 했죠. 그것은 놀이었습니다. 그 빌딩입니다. 모든 것은 페인트칠 되었습니다-- 그 모든 빌딩을 뒤덮어 타이포그라피가 칠해 졌죠, 에어컨덕트를 포함한 모든 곳이었죠. 저는 차고들의 옆에 고정된 평면을 칠했던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 빌딩을 칠하게 했는데요, 그들은 그 일을 사랑했죠. 그들은 그 일에 빠져버렸죠 -- 그들은 그 일을 믿기어려울정도로 진지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그 빌딩에 올라가서 저에게 전화하곤 했습니다. 저의 타이포그라피를 고쳐야 한다고 제게 말했죠. 저의 글자 간격이 잘못되었다고요, 그리고 간격을 고쳤습니다. 그들은 훌륭하게 해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매우 진지했습니다. 아주 훌륭했습니다.
제가 불룸버그 본점을 위해 작업할 때 쯤 저의 작업은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크고 비싼 장소들에 하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근엄하게 되기 시작했습니다. 불룸버그는 모든 것이 숫자에 대한 것이었고, 우리는 그 공간 모든곳에 큰 숫자들로 작업했습니다. 그 숫자들은 화려한 LED 위에 투영되었는데요, 저의 파트너인 리사 스트고스펠드가 프로그램했죠. 그러나, 그것은 놀이의 진지함의 끝이었습니다. 그것은 또 다시, 근엄하게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현재의 프로젝트인데요, 피츠버그에서 전 장난꾸러기가 됩니다. 저는 노쓰 사이드라 불리는 이 지역을 위한 로고를 디자인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기고, 저는 한 지역이 로고를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소름끼치는 일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왜 어떤 지역이 로고를 가져야 하지? 지역에는 랜드마크가 있고, 장소가 있으며,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로고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 되야하죠?
그래서 저는 시 위원회와 지역 선거구민에게 정말로 프리젠테이션을 해야했습니다. 전 피츠버그에 가서 정말로 당신들이 여기 가지고 있는것은 그 지역을 도심의 중심으로부터 그 지역을 나누는 이 모든 지하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들을 기념하고 그 지하도들을 랜드마크로 만드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고, 저는 이상한 프리젠테이션을 하기 시작햇습니다. 이 설치들에 관해서-- 이 지하도 다리들 위에 설치하는 잠재적인 설치였죠. 시 의원회의 앞에 섰는데요, 약간 두려웠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그러나 전 이 전혀 프로젝트에 대한 자격이 없었고, 아주 너무 터무니없었죠,, 그리고 그 개요를 너무 필사적으로 무시해서, 그들이 그것을 진심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완전히 그것은 시작하기에 너무 별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다리인데요, 그들은 실제로 페인트칠 되고 있고, 우리가 말한대로 준비되고 잇습니다. 그것은 6개월마다 바뀔 것이고, 피츠버그의 노스사이드의 예술적 설치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그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것입니다.
존 호큰베리가 저의 시티뱅크와의 일에서의 고통에 대해 여러분께 조금 이야기했었는데요, 지금까지 10 년된 관계이고, 그들과 여전히 일하고 있습니다. 사실 전 그들과 일하는 것이 즐겁고, 그들을 좋하합니다. 매우 매우 매우 큰 기업으로서 사실 그들이 그들의 그래픽을 매우 잘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미팅에서 저는 시티뱅크를 위한 로고를 냅킨위에 그렸습니다. 그것은 그 작업에 있어서 놀이 부분이었습니다. 그 다음 저는 길고, 지겨우며, 따분한 미팅으로 일년을 보냈습니다. 거대한 기업에, 눈물을 흘릴 정도까지 이 로고를 팔기 위해 시도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올해 말에는 미칠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우리는 비상식적인 프리젠테이션을 했습니다, 시티로고가 어떻게 이치에 맞는지 정말 어떻게 우산으로부터 파생되었는지 보여주면서요. 그리고 우리는 이것들의 애니매이션을 만들었습니다. 계속 왔다갔다 했습니다. 그것은 가치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것을 샀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대단한 규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국제적으로 인식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매우 매우 침울한 해였습니다. 사실상, 팰론이 아주 괜찮은 '부유하게 살자' 캠페인을 하고, 그후 모든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그들은 실제적으로 그 로고를 사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 저는 이 미칠것같은 길고 바보같은 미팅들에의 참석과의 균형을 취하는 힘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제 시골집에서 어떤 이유에선지, 이 아주 크고 아주 혼란스럽고, 인내를 요하며, 복잡한 모든 세계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행성에 있는 모든 장소들의 목록을 만들고, 거기에 넣으면서, 그것들의 철자를 잘 못 적고, 잘못된 장소에 써 넣으면서, 완벽하게 그 정보를 조정하면서, 완전하고 완벽하게 그것에 열중해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6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다음부터 저는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미국이 있습니다. 미국의 모든 도시들이 여기 있기 있으며 8개월 가량동안 쿠퍼휴잇 미술관에 걸려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작품까지 걸어와서 그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킬것이었고, 오, 나 여기 가봤어 라고 말할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가봤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잘못된 지점에 있었으니까요. (웃음) 그러나 제가 좋아한것은, 제가 저의 비상식적인 정보를 조정하고 있었고, 저 자신의 정보의 팔레트를 창조하고 있었으며, 제가 완전하고 완벽하게 놀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것 중 하나는 이 2000년 선거 다음에 플로리다를 그린 것인데요, 물에서 선거의 결과가 돌아가는 것을 그렸습니다. 증거품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떤사람이 저의 집까지 와서 그 그림들을 보았고, 갤러리에 그것들을 추천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전 2년 6개월 전에 첫번째 전시회를 했습니다. 저는 지금 보여드리고 있는 이 그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다음,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 그 그림들이 팔린 것이죠, 그림들은 빨리 팔렸으며, 인기를 얻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그림들로부터 프린트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그 시리즈의 하나인 맨하탄입니다. 이것은 빨강, 하양, 파랑으로 칠한 미국을 프린트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큰 실크스크린 프린트들을 하기 시작했고,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갤러리는 제가 2년안에 다른 전시회를 하기를 원했는데, 그건 제가 정말로 이 그림들을 제가 해왔던것 보다 더 빨리 그려야 함을 의미했죠. 그림들은 더 정치적이 되었으며, 저는 뉴스에 나왔던 지역이나, 제가 어떤 감정을 가졌던 지역 등을 택해서 이 그림들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저는 전시회를 위한 기대를 채우는 엄숙한 풍경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 그림들을 시작한 지점이 아니었죠. 그래서 그림들이 성공적으로 되었을 때, 저는 어떻게 그리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 초심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림들은 더 이상 진지하지 않습니다 -- 그들은 엄숙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사실입니다 -- 제가 어떤것을 시작하고, 그것이 그렇게 바뀔 때 -- 왜냐하면 모든 것은 되돌아오고 다음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당신이 추진할 수 있고, 창조할수 있고, 당신이 무지할 수 있으며, 오만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으며, 바보같을 수도 있다는 것을요. 왜냐하면 결국은, 그렇게 자라는거니까요.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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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 쉐어는 디자인에 있어서의 인생을 뒤돌아본다. (그녀는 앨범 커버, 책, 시티뱅크 로고 등을 작업했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즐거움을 갖기 시작한 때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녀의 전설적인 경력으로부터의 훌륭한 디자인과 이미지들을 기대하세요.
With a career that fuses rock and roll, corporate identity creation, and impressionistic geography, Paula Scher is a master conjurer of the instantly familiar. Full bio »
Translated into Korean by Mihye Lee
Reviewed by Seo Rim Kim
Comments? Please email the translators above.
04:45 Posted: Sep 2008
Views 418,097 | Comments 36
17:00 Posted: May 2007
Views 402,566 | Comments 25
23:34 Posted: Jul 2006
Views 526,209 | Comments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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